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

박원순 시장 “노동자를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를” - 2017년 7월 17일


김영주 고용장관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겠다” - 2017년 8월 14일

근로자와 노동자 한자 풀이

근로자는 한자어로 부지런할 근(勤) 일할 로(勞) 놈 자(者)

즉 자본가가 주체가 되어 부지런히 일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주겠다


노동자는 한자어로 일할 로(勞) 움직일 동(動) 놈 자(者)

내가 직접 움직여서 일했기 때문에 당연히 대가를 받는다는 것


결국 '근로자'는 말 그대로 근면 성실하게 국가나 회사를 위해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종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스스로 힘써 주체적으로 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일에 대한 주관과 자부심을 갖고 노동자로서 권리를 갖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노동절의 유래

5월 1일은 메이데이(May Day)이다. 1884년, 미국노동총동맹(AFL)은 [1886년 5월 1일부터 1일 8시간노동제를 채택할 할 것]을 주장하는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의 장시간 노동에도 1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 하는 허름한 판자 집의 방세내기에도 어려운 노동조건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다수 노조지도자들의 무관심과 적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에 대한 지지는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마침내 1886년 5월1일 미국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운동의 중심지인 시카고에서는 4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하였는데, 5월 3일 맥코믹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 200명의 무장경찰이 총기를 발사하며 강제로 진입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 다음 날 이러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은 헤이마케트 광장에서 평화적 집회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다가오는 경찰대열에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은 폭탄이 터져 경찰관 1명이 사망하게 되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 폭동죄로 다수의 노동운동가들이 체포되어 7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3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것이 노동절의 유래가 된 헤이마케트 사건이다. 1889년 7월 세계 각 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하여 싸웠던 미국노동자의 투쟁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월 1일을 세계노동절로 결정하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890년 5월 1일 세계 각 국의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한편 미국 정부는 헤이마케트 사건의 진실을 숨기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5월 1일을 [법의 날]로 정했다.

우리나라도 1923년 이후 매년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기념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은 1957년부터 미국과 마찬가지로 5월 1일을 [법의 날]로 정하고 근로자의 날은 매년 3월 10일로 하였다.

그러다 1994년부터 5월 1일 [법의 날]을 동시에 [근로자의 날]로 지정하다가 올해부터는 법의 날을 구한말 최초의 재판소가 설립된 날인 4월 25일로 변경함으로써, 비로소 5월 1일이 노동자만을 위한 메이데이로 남게 되었다. 다시 찾은 노동자만을 위한 메이데이를 생각하며, 제1회 메이데이의 슬로건을 오늘 다시 외쳐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한국의 노동절의 역사

1. 일제 치하, 해방 직후의 노동절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대회는 일제 치하에서 치러졌다. 1923년 2천여 명의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를 주장하며 노동절대회를 치렀고,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해방까지 계속되었다. 1946년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주도로 20만 노동자가 참석해 노동절대회를 성대히 치렀다. 한편, 노동자의 단결을 막기 위해 정권 주도로 만들어진 대한노총은 같은 시각 바로 옆에서 천여 명의 우익단체들을 동원해 기념식을 치르고 있었다.

2. 이름도 날짜도 빼앗긴 노동절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전평을 탄압해 무력화하는 한편 대한노총을 키워갔다. 이로 인해 1948~58년의 노동절대회를 대한노총이 주관하게 되었고 노동절은 이제 노동자가 자본가와 정권에 충성을 다짐하는 날로 전락해 버렸다. 급기야 1957년에는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당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이유로 날짜를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바꾸어버렸다.

이후 5.16 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변경했다. 당시 정권과 자본가들에게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는 파괴 대상이었고, 정부 정책과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근로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일조차 빼앗긴 채 억압과 무권리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3. 다시 찾은 메이데이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시작했지만, 이 민주주의는 공장 앞에서 멈춰 섰다. 이를 공장 안으로까지 밀고 들어간 것은 같은 해 연이어 전개된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 성과를 모아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가 만들어졌다. 1989년 투쟁본부는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한국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노동절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였다.

4. 노동자의 생일, 감격스러운 노동절

1989년 경찰의 원천봉쇄와 삼엄한 감시를 뚫고 전국의 노동자와 청년들이 연세대로 속속 모여들었다. 4월 30일 전야제를 갖고 다음 날인 5월 1일 감격스러운 노동절대회를 개최하였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의 구속, 수배, 목숨을 내던진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생일이자 명절인 노동절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1994년에는 정부도 명칭은 그대로 ‘근로자의 날’로 두었지만 날짜는 5월 1일로 개정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이후 전국 노동자들은 매년 5월 1일에 한 자리에 모여 연대와 단결을 확인하며 노동절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 Recent posts